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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땅

서던 리치 제 1부작
제프 밴더미어
SF 호러 탐사
공포 요소 - 자연,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미지의 존재, 불신, 불쾌한 골짜기, 도플갱어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 소설. 스크린을 보며 느꼈던 아름다움을 과연 활자로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작가의 뛰어난 묘사와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후기를 둘러보니 작품의 애매함과 모호함, 찝찝한 끝 맛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던데 나는 이야말로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자 작가의 노림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소재 자체 ‘미지’인데 그 어떤 명확한 해석을 바라겠는가?

책을 읽으며 새로웠던 점은 총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SF 호러 탐사물인데도 소위 말하는 외계인의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소설에서 공포를 조장하는 존재는 대부분 변형된 인간, 변형된 동식물이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 사건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우주에서 온 색채’가 가져다준 건 사실 생태의 변화 하나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간(소설 안팎 모두)에게는 이것이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작품이 호러 장르가 된 게 재밌다고 느낀다. 실제로 X구역의 생태 변화가 인간에게는 해악이자 공포일지언정 지구라는 행성에는 오히려 이익일지도 모른다는 투의 묘사가 나오기도 하고, 주인공이 생물학자인 것까지 미루어 보았을 때 독자들로 하여금 환경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두 번째로 새로웠던 점은 이 작품이 흔한 성별 클리셰를 반전시켰다는 것이다. 우선 SF 탐사라는 장르에서 주인공이 전부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다가, 무뚝뚝하고 고독을 즐기는 괴짜 여자 주인공과 활기차고 아름다우나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그의 남편만 봐도 그렇다. 소설 속 묘사를 보면 남편은 주인공에게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하염없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길 기다린다. 이는 마침 최근 읽은 고전 이방인과 대비되어 ‘냉철하고 무관심한 주인공을 언제까지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롤’은 더 이상 여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감상을 주었다.

이 소설은 SF 탐사, 호러라는 장르에도 충실했다. 우리는 과묵하지만 호기심 많고, 가끔 불도저 같은 경향이 있는 주인공과 함께 미지의 장소 X구역을 탐사하며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괴물은 소설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무섭고 끔찍한 묘사를 하기보다는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X구역은 종종 ‘하늘에는 같은 종이 아닌 새매와 해오라기, 독수리가 한데 날며 바다에 사는 돌고래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동시에 주인공은 돌고래의 눈에서 ‘고통스러울 만큼 인간적이고 친숙한 감정‘을 느낀다. 이 대목이 꽤 으스스한 상상력을 유발한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회상이다. 그녀는 외동이고, 방치형 부모 밑에서 자라왔는데 그때 나온 묘사는 아래와 같다.
때로 나는 어떤 가정에 태어났다기보다 그냥 놓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린 주인공은 제대로 된 교우관계를 맺지도 않고 마당에 방치된 수영장에 자리잡은 작은 생태계에 푹 빠져 살았다. 작가는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흔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주인공과 비슷한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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